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작업을 마치고 늦은 귀가를 하던 날이었다.


택시에 오르며 목적지를 말하자 동선을 다시 묻는다. 난 만덕터널과 산성 길(금정산 자락 아래에 집이 있는지라), 두 경우를 이야기하다가 산성 길은 좀 그렇지요 라고 말을 얼버무린다. 그러나 기사 아저씨는 괜찮습니다, 산성 길로 갈까예, 하며 식물원 쪽을 향한다. 사실 산성 길은 밤 늦은 시간엔 승객도 기사도 다 꺼리는 코스이다. 서로를 두려워하며 '강도로 돌변하지 않을까' '산길 으슥한 곳에서 해코지하진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을 산 넘는 내내 품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산성 길의 꼬불꼬불 휘어진 노선은 노련한 운전자도 바짝 긴장하게 만든다. 하지만 하루 내내 긴 작업에 몸이 지쳐 있던 나로서는 별 긴장감 없이 뒷좌석 등받이에 기댄 채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밤중에 산성 길 택시 타고 가며
갑자기 무서웠던 씁쓸한 경험


산성 길 초입에 들어서자 택시 기사 아저씨가 정적감이 부담되었던지 급작스레 말을 꺼낸다. "사춘기 지난 여자라지예…." 그날 뉴스를 시끄럽게 했던 엽기적인 살인 사건 피해자 이야기였다. 마침 끔찍하고 자극적인 보도 방식이 못내 못마땅한 차여서 짧게 "네, 휴-"하고 한숨으로 대답했다. 공포는 사람들의 비판의 날도 무디게 만드는 고약한 것이라 악용되기 쉽다. 할 말이 많았던 기사님은 머쓱했는지 이내 조용해졌다. 이 공포스러운 사회에 함께 몸서리치면서 마녀사냥이라도 해야 하는데 말이다.

그렇게 다시 정적이 흐르자 묘하게도 이번엔 내가 산성 길이 슬슬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헤드라이트가 비추는 곳 이외에는 깜깜한 어둠뿐인 검은 숲 오르막은 공포를 비웃던 나를 다시 비웃기 시작했다. 오르막을 휘감을 때마다 헤드라이트에 잡히는, 팔을 번쩍 든 앙상한 나무들은 앞 운전석의 아저씨와 한패처럼 나에게 적대적인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간간이 맞은편에서 내려오는 차들은 냉정하게도 이내 사라졌다.


난 포기하는 심정으로 이 상황을 무시하기로 했다.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안성에 사는 선배 작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목적 없이 이 시간에 편히 전화할 수 있고 또한 북미 인디언보호구역에 함께 갈 수 있었던 유일한 친구이다. 부산에만 있지 말고 한 번씩 서울 와서 작가들 비평가들도 만나보라며 항상 나의 활동 반경이 좁아지는 걸 걱정하던 언니였다. 신호가 제법 울렸으나 좀처럼 받지 않는다. 곧 전화한 걸 후회했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는 그 언니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다. 전화도 잘 받지 않는 편인데 대체로 작업 중이거나 뒤뜰에서 산책할 때가 많았다.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 저편에서 "어이-"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언니의 전화 받는 방식이다. 물론 친근함의 표현이다. 나는 안심했다. 왜 전화했느냐고 묻지도 않는다. 언니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직전의 공포심은 죄다 사라져 버리고, 그동안의 삶의 서글픔을 칭얼거리고 싶은 마음이 불쑥 올라왔다. 하지만 나는 마음에도 없는 주변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다. 흔들리는 내 목소리를 감지한 언니는 당장 서울에서 만날 약속을 잡는다. 얼떨결에 나도 그러자고 한다. 내가 통화하는 사이 잠자코 핸들을 꺾으며 달리던 기사 아저씨의 택시는 어느새 꼭대기 산성마을을 넘어 내리막길에 접어들고 있었다. 커브 길은 조금은 완만해져 갔다. 검게 보이는 나무들 틈새 큰 바위들이 듬성듬성 내 눈에 들어왔다.


내리막 중반에 이르자 점점이 산 아래 마을의 불빛이 빛나기 시작했고 택시는 너무도 부드럽게 굽이쳐 내려갔다. 그제야 백미러를 통해 선한 아저씨의 눈매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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